태어난 인간은 반드시 변화한다.
* 시작 전, 본 글에는 각종 적나라한 묘사와 민감한 소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심 기준으로 작성된 글이며 개인해석 등이 존재합니다.
* 밀그램 장르의 사쿠라이 하루카 캐릭터의 독백으로 작성된 팬픽입니다.
그에게는 줄곧 외면해오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건 어머니의 품처럼 다정하지만 어두운 고독처럼 끔찍하고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외면했다. 필사적으로 보지 않기 위해 눈을 돌리고 안전한 내부에서 몸을 웅크리고 살아왔다. 하지만 인간은 언젠가 모든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것은 당연한 진리요, 일종의 불가항력적인 이야기다. 누구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어떤 어리석고 아둔한 이라도 결국에는 진실을 알아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건 사쿠라이 하루카에게도 예외가 아니였다. 당장 앞의 불가항력이라는 단어조차 자세히 설명할 수 없는 하루카조차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동안 그는 부정했다. 이유가 무엇이었지? 그것은 두려움이라 붙일 수 있는 단어였고, 그 다음으로는 비참함과 죄책감이라 붙일 수 있는 단어였다. 외면하고 싶었던 것.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간단한 단어임에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 이유를 찾을 수 없어 이해할 수 없었던 것. 정말로 믿고싶지 않았던 것이 와닿는다. 그렇다, 모든 인간은 변모한다. 태어나버린 이상 모든 인간은 일종의 변화를 거치는 것이다.
변화. 고작 두글자인 단어에 하루카는 종종 겁을 먹고는 했다. 늘상 그런 것은 아니였다. 다만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현실을 어쩔 수 없이 자각하게 될 때에는, 그 단어가 그렇게 두려웠다. 어릴 적에는 분명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과거를 떠올리기 전 하루카는 한 단어를 생각한다. 제법 고심을 거친 다음에야 그 단어를 기억할 수 있었다. 성장. 변화와 성장은 비슷한 의미라고 생각되었다. 물론 차이는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어려운 이야기는 하루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아진다. 커진다. 그런 의미에서 변화와 성장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하루카는 무심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그것은 조금 더 성장해있었다. 별로 달가운 사실은 아니였다. 그러고보면 모든 것이 틀어진 것은 자신이 성장하고 난 다음이었다. 자신은 분명 달라졌다. 예전보다 키가 커졌고, 손도 발도 커졌다.
하루카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나잖아. 그 말대로, 하루카는 변한 적이 없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는 특별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가 바뀌기 시작했다. 하루카는 언제나 자신으로써 존재하였는데, 주변에서는 하루카가 꼭 무언가를 하기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도 말했다. 고작 일상에서 필요한 그런 일들 몇가지 뿐이라고. 하지만 하루카는 그것들을 학습할 수 없었다. 배움은 어려운 것이다.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것에는 남들보다 더한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을 오래 쏟아도 결국 해내지 못하는 일도 많았다. 하루카는 그런 것들을 배워가며 생각했다. 어째서 전부 바뀌어버린 것일까. 배우지 않고, 어려운 것들은 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을까. 사고를 열심히 회전시켜도 명쾌한 정답은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의 태도가 바뀐 것은 꼭 그쯤이었다. 몇번째 실수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숫자를 외우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그 숫자는 아주 큰 숫자였다는 것이다. 실수, 실수, 실수. 요구하는 것들을 하루카는 해낼 수 없었다. 어머니는 다정했다. 여러번 실수해도 웃어주었다. 그래서 하루카는 그 기대에 보답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마음과 현실은 달랐다.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어떻게 해도 이룰 수 없어서, 물건을 떨어트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다정했던 어머니는 한순간 표정이 굳었던 것도 같다. 하루카의 기억에는 희미하다. 마음에는 깊이 남은 그 표정은, 기억속에서는 지워져가고 있었다. 하루카는 그 표정이 다시는 보고싶지 않아서, 어머니를 힘들게 하고싶지 않아서, 그래서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하여도 다른 아이들과 비교당하고 말았다. 다들 할 수 있는데 왜 너는 못하냐는 말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고,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바닥을 본다.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몇번이나 돌려봤지만 여전히 변한 것은 없었다. 달이 지나고 해가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하루카를 혼냈다. 어째서 할 수 없냐며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고, 어떤 때에는 다정하게 안아주시며 제발 부탁이라고 하기도 했다. 어느것도 하루카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렇지만 하루카는 어머니가 속상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부 자신의 탓이라고도 생각했다. 물론 무엇을 잘못하였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죄악감은 마음속 깊이 자리잡았다.
언제부턴가 어머니는 하나 둘 씩 포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좋았다. 어머니가 어려운 것을 시키지 않으니, 하루카는 그저 기쁠 뿐이었다. 더이상 어려운 문제를 푸는 것도, 혼자서 집안일을 하는 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기뻤다. 그래서 어머니를 안으려고 했다. 어머니는 잠시간 안아주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서 어딘가로 가는데, 하루카는 그 모습이 꼭 지쳐보인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정답이었다. 어머니가 포기한 것은 자신을 가르치는 것 뿐만은 아니라는 것을, 하루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최소한의 만남을 유지하였으나, 그 이상의 애정을 퍼부어주지 않았다. 예전처럼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걸어주며 웃어주지도 않았다. 안아주거나 자기 전 잘자라며 이마에 입맞춤을 해주지도 않았다. 방 안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며, 하루카는 비로소 어머니가 포기한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사쿠라이 하루카를 포기했다.
두려웠다. 버림받는 것은 싫었다. 어머니가 다시 예전처럼 안아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관심을 받고 싶었다. 어떤 수를 써도 좋았다. 처음에는 그저 일부러 넘어지거나 하는 정도의 행위였다. 그것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조금 후에는 어머니가 완전히 오지 않았다. 하루카는 불안했다. 제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울 것만 같았다. 어떤 날은 하루종일 울었던 것도 같다. 그러다가 마침내 하루카가 한가지를 결심한 것은, 어머니가 외출하였을 때의 일이다. 그날은 어머니가 바깥에 일이 있어 잠시 나가셨는데, 하루카는 어머니가 너무나도 보고싶어져서 어머니에게 향했다.
방 문을 여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어머니의 화장대와 서랍같은 것들이 보였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끌어안기도 하였고, 옷장 안을 살펴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목격한 것은 어머니가 좋아하던 장신구였다. 하루카는 문득 생각했다. 어릴 적 어머니가 하였던 말. 다른 것은 다 안 해도 괜찮으니까, 나쁜 일은 해서는 안되는거야. 심장이 조금 두근거린 것도 같았다. 하루카는 그순간, 해답을 찾은 것만 같았다. 손이 떨려온다. 고민이 깊다. 어쩌지, 하는 말만 반복하였다. 조심스럽게 어머니가 알려준 대로 서랍을 열었다. 안에 들어있는 장신구 상자 중 하나를 들었다. 그걸 들고 복도를 살금살금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루카는 뛰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러면, 이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어머니가 혼내주실거라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머니는 전혀 혼내지 않으셨다. 단지 지친 표정으로 보았을 뿐이다. 어쩌면 그 표정에는 체념과 경멸마저 섞여있었다. 어머니는 그저 하루카, 돌려줘. 그런 간단한 단어들만 말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누르고 다시 돌려주고, 잘못했어요. 하고 말하려고 하였을 때였다. 어머니는 그대로 방 문을 닫고 나갔다. 하루카는 두려운 마음 반, 설레는 마음 반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조심스레 방 문을 열고 나가보니, 어머니는 그저 다른 사람과 통화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주제마저도 자신은 아니였다.
두려웠다. 두렵고, 두렵고, 두려웠다. 하지만 방법을 몰랐다. 조금 약해서 그럴까? 조금 더 심한 짓을 한다면, 그러면 어머니가 제대로 화내줄까. 물론 어머니가 혼내는 것은 싫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싫은 것은 어머니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건 죽음과도 같았다. 하루카는 죽고싶지 않았다. 잊혀지고 싶지 않았다. 따스한 곳에서 살아가고 싶었다. 변화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 듣고 싶었다. 그래서 죽였다. 배웠던 것들을 반대로 행했다. 어떻게 해도 나아갈 수 없다면 역행하면 그만이었을지도 모른다. 죽이는 것은 두려웠다. 처음에는 죄책감도 들었다. 물고기가 바닥에서 파닥거리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얼굴을 틀어막았다. 괴성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소리가 몸에서 새어나온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번에야말로 어머니가 자신을 봐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그래서 웃었다. 엉망진창인 얼굴이었다.
심한 짓을 하고 나면 어머니는 언제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는 화가 난 것보다는 놀라고, 몹시 두려웠던 것 같다. 그렇지만 하루카는 그정도의 반응에도 기뻤다. 이 얼마만의 행복인지! 엄마, 저 하면 안될 짓들을 했어요. 천진한 얼굴로 히죽이며 바라보면, 어머니는 언제나 입을 틀어막으셨다. 다가가면 뺨을 때리거나 문을 닫아버리기도 하셨다. 하지만 하루카는 그저 기뻤다. 아, 이것이야말로 정답이었다. 훔치는 것 정도는 역시 약했던 것이다. 관심을 받기 위해서는 조금 더 나쁜 일을 해야했고, 그건 다른 것을 빼앗는 것이다! 죄책감은 갈수록 무뎌졌다. 그보다 어머니가 주는 관심이 더 중요했다. 기쁨이, 사랑이, 그 온전한 감정이.
훗날, 하루카는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이 보통의 변화를 거칠 수 있었다면, 그랬으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었을까. 자신이 이런 곳에 오는 일도 어린아이가 죽는 일도 누군가를 죽이는 일도 없었을까. 제대로 성장할 수 있었다면 자신은 조금 더 행복했을까. 어째서 자신은 시작점부터 글러먹었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일까. 어째서 자신은 글러먹었을까. 어째서... 수많은 의문이 머리를 스친다. 하지만 어느것도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루카는 그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엄마, 저에게 성장은 역시 어려워요.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변화는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엄마, 사랑하는 엄마, 저는 변화하고 있어요. 보통은 될 수 없어도 저로 남을 수 있어요. 저는 언제까지나 여기에 저로써 있을거예요.
하루카는 침대에 몸을 눕혔다. 웃음이 흘러나왔다. 기뻤다. 그렇지만 그 감정의 이면에 있던 슬픔은 이유를 상실했다. 어째서인지 알 수도 없는 슬픔에 그저 웃는 것 외에는 할 수 없었다. 얼핏 보았다면 제법 우스운 장면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루카는 팔을 벌리고, 침대에 누워, 그저 웃었다.
이번에는 괴로운 꿈을 꾸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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